‘열심히 일만 하는 근로자’에서
‘이 세상의 주인인 노동자’로 바뀌기까지
나 이 마흔 무렵에야 ‘열심히 일만 하는 근로자’에서 ‘이 세상의 주인인 노동자’로 글쓴이를 바꿔 놓은 건 바로 ‘책’이다. 버스 운전사를 하던 시절, 홍제동 지하 방에 살면서 동네에 있는 주민 독서실에서 만난 《쿠바 혁명과 카스트로》가 바로 그 책. ‘혁명’이라는 단어만 봐도 괜히 거부감이 생기던 때였지만 다행히 그 책이 만화책이어서 쉽게 펼쳐 볼 수 있었다. 이 책을 보면서 엄청난 충격을 받은 안건모는 “그 책은 나를 어둠에서 처음으로 끌어내고, 세상에서 다른 한편을 볼 수 있게 만들었다.”고 말한다. 그 뒤로 《태백산맥》《찢겨진 산하》《노동의 새벽》처럼 제목부터 거부감을 주는 책들만 골라 읽으면서 그는 학교와 사회에서 멸공 극우 사상과, 어처구니 없는 독재 사상만 배웠다는 걸 깨닫게 된다.
하지만 여전히 무엇엔가 가슴이 억눌리는 마음을 담고 살아야 했던 글쓴이에게 새로운 기회가 찾아왔다. 1996년 월간 <작은책>을 보면서 ‘아! 우리 같은 노동자도 글을 쓸 수 있구나’하고 깨달은 것. 그 뒤로 작은책 글쓰기 모임에 나가면서는 , 이오덕 선생님이 “글은 일하는 사람이 써야 하고, 누구나 읽기 쉽게 써야 한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는 자신이 생겨 쓰기 시작한 글이, 이렇게 한 권의 책이 나오게 된 밑바탕이 됐다.
안건모는 2004년 12월을 끝으로 버스 일터를 떠나 작은책 편집장으로 일하고 있다. 버스 현장보다 더 넓은 곳에서 올바른 언론?문화 운동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안고, 일하는 사람들이 꼭 봐야 하는 월간 <작은책>을 만들면서 이 땅의 모든 억압과 불의에 맞서 싸우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다.
1장, 시내버스 알고나 탑시다
시내버스 기사들이 왜 그렇게 난폭하게 운전을 해야 하는지 처지를 바꾸어 생각할 수 있는 글들이 담겨 있다. 버스를 타는 손님 처지에서는 ‘서울에서는 시내버스를 타기 위해 최소한 네 가지 정도 능력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첫째는 눈이 좋아야 하고, 둘째는 달리기 실력이 있어야 하고, 셋째는 눈치가 빨라야 하고 넷째는 인내심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버스 기사도 마찬가지다.
‘서울에 서는 시내버스를 운전하기 위해 적어도 네 가지 정도 능력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첫째는 눈이 좋아야 하고, 둘째는 달리기 실력이 있어야 하고, 셋째는 눈치가 빨라야 하고 넷째는 참을성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살벌한 시내버스 회사에서 운전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
왜 그럴까? 그 까닭에 대해서 생생하게 살펴 볼 수 있다.
‘우선 눈이 좋아야 멀리 숨어서 단속하는 경찰관을 발견할 수 있다. 눈이 나쁘면 일 년에 몇 번씩 정지 먹는 딱지를 뗄 수밖에 없다. 달리기 실력이란 속된 말로 ‘조진다’고 한다. 운전하면서 옆 차 백미러와 내 차 백미러 사이에 두꺼운 도화지 한 장 끼우면 딱 맞을 정도로 사이를 두고 70, 80킬로미터로 조질 수 있는 실력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종점에 들어가서 오줌 눌 시간을 벌 수 있다.
또 아무리 눈이 좋고 잘 조진다 해도 눈치가 없으면 정류장을 통과할 수 없다. 저 손님이 내 차를 탈 ‘말뚝 손님’인지 아닌지 판단해야 하고 술에 취한 사람인지도 판단해야 한다. 정류장을 통과해야 밥 먹는 시간 5분을 벌 수 있다. 그리고 지독하게 참을성이 없으면 끝없이 싸우자고 덤비는 옆 차 기사들과 또 손님들과 하루종일 대가리 터지도록 싸울 수밖에 없다.’ (본문 24쪽)
2장, 시내버스를 타는 사람들
안 건모가 모는 버스를 타고 다니는 여러 사람들을 보여 준다. 깡패 같은 사람들, 술 취한 사람들, 그리고 안건모가 모는 버스를 한 시간이나 기다리던 수연이 같은 아이들 이야기가 실려 있다. 또 버스 운전을 하면서 만난 변호사, 식당 아주머니나 그와 함께 생활한 둘레 사람들 이야기도 정감있게 그려내고 있다.
‘그러면서 나한테 “아, 형님”하면서 고개를 거들먹거리면서 거수 경례를 붙인다. 돈을 받지 말라 이거지. 개똥이다. 이놈아.
“돈 을 내셔야 됩니다.” 점잖게 한마디 했다. 그 털보 대뜸 “뭐야, 야 이 새끼야! 돈을 내?” 하면서 길길이 날뛴다. 그러면 내가 ‘죄송합니다. 그냥 들어가십시오.’ 하나? “돈 안 내면 내려!” 결국 차에서 내려 보냈더니 길길이 날뛰면서 배차실로 간다. 또라이 새끼 가거나 말거나. 하여튼 정말 별 손님 같지 않은 손님도 있다.
그런가 하면 정말 더운 여름철에 한줄기 시원한 소나기마냥 반가운 단골손님들이 있다. 달님이 같은 아이들이다. 달님이는 선일여상 2학년을 다닐 때 알았는데 올해 스물세 살이니 벌써 5년이 되었나 보다. 달님이는 내가 길이 막혀 조금 늦게 가면 회사에서 기다렸다 나오기도 했다. 어떤 날은 시원한 주스를 사서 주기도 했다. “달님아, 이런 거 왜 사 와? 돈도 없을 텐데.” 하면 달님이는 그저 환하게 웃었다. 달님이는 3년 넘게 직장을 다니다가 올해 경기도 평택 근처에 있는 연암축산원예전문대를 갔다. 한 2, 3일 강의가 없어 오늘 집에 올라왔는데 내 차를 탄 것이다.
우리 회사 차 번호 전체를 외우고 내 차 1774호를 알고 기다리느라 어떤 날은 정류장에서 3, 40분씩 일부러 기다리던,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만났던 수연이, 그 동생 정우. 내 차를 타고 내릴 때 인사를 한 열 번은 하던 현지. 또 조금 까불까불하던 성은이, 와산교 할머니 집에 자주 가던 지혜, 그리고 얼굴이 갸름했던 미정이, 내가 병원에 있을 때 수연이랑 면회 왔던 윤이. 뚱뚱했던 소영이와 그 남동생, 주유소에 아르바이트를 나가면서 옷차림을 이상하게 해 나쁜 길로 빠질까 봐 마음졸였던 미숙이, 키가 작아 놀림 받던 덕제, 덕제 동생 은영이…….’ (본문 107쪽)
3장, 삶이란 곧 싸움이다
여 태껏 나왔던 ‘시내버스 파업’이 노동자들 파업이 아니라 시내버스 사업주들과 어용조합, 게다가 정부까지 한패가 되어 짜고 한 파업이라는 사실을 파업 현장 가까운 곳에서 본 생생한 이야기들이 실려 있다. 또한 기사들이 하는 삥땅의 역사에 대해서도 밝혔다. 삥땅은 기사들이 도둑놈 심보라서 문제인 게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들이다. 또 그 삥땅을 무기로 천만 원이나 되는 퇴직금, 상여금을 떼어먹으려는 사업주와 그것을 찾으려는 기사들 이야기도 있다.
‘사업주들은 열 받아 통을 또다시 만들었다. 토큰 통 안쪽 양 옆으로 서로 엇갈리게 혓바닥을 몇 개 비스듬하게 붙여 놓았다. 고기 가시처럼 옆면이 넓적하게 생겨 돈이 떨어지기는 해도 올릴 때는 걸리게끔 한 것이었다. 이제는 돈을 꺼낼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힘들겠는데.” “야, 들어가는 구멍이 있으면 나오는 구멍이 있는 거야.” 운전사들은 뻣뻣한 철사로 만든 끈끈이로 돈을 꺼낼 수 없게 되자 또 다른 연장을 만들었다. 화투장 크기만 한, 두꺼운 철판에다가 양면테이프를 붙이고 거기에 파란 테이프로 줄을 만들어 길게 늘어뜨렸다. 이 찐득이는 통 안에 집어 넣으면 어떤 장애물이 있어도 흐느적흐느적하면서 안으로 깊이 들어가 종이돈이 붙어 따라 올라오게 되어 있었다.’ (본문 159쪽)
4장, 시내버스를 정년까지
안건모가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가 실려 있다. 초등 학교를 졸업하고 공장 생활을 시작한 뒤부터 버스 운전 기사로 살아오기까지 다양한 삶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주민 독서실에서 우연히 본 《쿠바 혁명과 카스트로》라는 만화책으로 극우주의에서 진보주의로 바뀐 이야기나, ‘시내버스를 정년까지’ (제 7회 전태일 문학상 ‘글쓰기 부문’ 우수상을 받은 글, 1997)에서는, 글쓴이가 열심히 일만 하는 근로자에서 이 세상의 주인인 노동자로 삶을 바꾸게 된 과정을 잘 엿볼 수 있다.
추천하는 글
버스 운전사와 글쓰기 - 홍세화
한국 사람들의 참모습 - 미야우치 마사요시
'한국 축구' 같은 안건모, 그리고 그이의 글 - 정범구
머리말
1장 시내버스, 알고나 탑시다
시내버스 알고나 탑시다 / 동떨어진 법 억지 단속 기막혀 / 아저씨, 남대문 아직 멀었어요? / 첫차 / 졸음운전 / 내가 손님이 돼 보니 / 시내버스 운전사가 성질이 나빠지는 까닭은 / 시내버스 / 에어컨보다 시원한 바람 / 거스름돈 기어코 받아 가자 / IMF와 버스 운전사 / 개판
2장 시내버스를 타는 사람들
노동자와 변호사 / 명님아 힘내 / 정희네 이사 가는 날 / 단골손님(1) / 딘골손님(2) / 꼬마손님 / 버스 식당 아주머니 / 한 지붕 세 가족 / 내 몸 / 아내와 사랑하기 / 통일하지 맙시다 / 천사 같은 '또라이'들
3장 삶이란 싸움이다
사업주도 파업하네 / 삥땅 전쟁과 감시 카메라(CCTV) / 버스 사고 / 임자 만난 사업주 / 핑계 / 시내버스 조합장 선거 / 오늘도 여전히 버스일터를 지킨다 / 나는 휴가 간다 / 관리자들 탐구 / 왕따 / 징계위원회 풍경 / 짜고 치는 고스톱 / 징계위원회? 개똥이다! / 한밤중의 테러 / 동료들 이야기 / 내 돈 내가 달라는데 / 마지막 운전
4장 시내버스를 정년까지
고추장에 꽁보리밥을 비벼 먹으며 / 철거계고장에 학교를 그만두고 / 보안대에서 군대생활을 하고 / 돈 천 원을 들고 전국으로 / 직업소개소 / 형사고로 빈털터리가 되었다 / 결혼식도 치르지 않고 살았다 / 생활은 나아지지 않았다 / 내 일을 찾았다 / 주민독서실 / 누가 우리 편이고 누가 적인가 / 싸우더라도 링 위에서 싸워야지 / 시내버스를 정년까지 / 프로기사(바둑)와 버스기사의 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