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하고 해맑은 인민의 수호 전사,
비전향 장기수 허영철의 말과 삶
2000년 극적인 비전향 장기수의 ‘송환’이 이루어지면서, 아니, 그 이전에 6․15 공동선언을 비롯해 남북 화해의 분위기가 무르익으면서 이제까지 역사의 뒤에 묻혀 있던 많은 장기수 선생님들의 이야기가 책으로 세상에 나왔다. 그러나 이 책들은 깊은 감동과 가르침을 주지만, 한편으로는 장기수라는 커다란 삶의 무게에 눌려 조금은 딱딱하고 읽기 힘든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 책은 그런 딱딱함과 무게를 버리고 비전향 장기수 허영철의 말과 삶을 작은 결 하나 놓치지 않고 다채롭고도 따뜻하게 담아냈다. 여섯 개의 장과 여섯 개의 인터뷰, 촌철살인의 미니 인터뷰, 남북을 아우르는 각주, 어느 것 하나 소홀할 수 없는 별첨 표까지, 다양한 구성 속에 저자의 이야기는 때로는 소설처럼, 때로는 철학서처럼, 때로는 흥미진진한 역사 평전처럼 한순간도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흡입력이 있다.
또한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해방과 한국전쟁, 분단과 현재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질곡을 고스란히 건너 온 허영철의 이야기는, 그 자체만으로도 새롭게 읽는 한국사로서 자리 매김 된다. 읽다 보면 손에 땀이 고이고, 가슴이 촉촉해지기도 하고, 때로는 뜨겁게 달아오르기도 하면서 저자와 더불어 우리나라 현대사의 행보를 가장 생생하고 의미 있게 경험할 수 있다.
민중이 쓴 민중의 역사
이 책은 무엇보다 현실에 가장 뿌리박고 있는 민중이 바로 그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이 책에는 유명한 사람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인민군대를 통괄하는 사령관 김일성보다는 북녘 인민위원회 작은 리의 위원장이 더 중요하게 등장하고, 남녘의 최고 권력자였던 대통령 박정희보다는 삶의 고단함에 떠밀려 삯바느질로 생계를 잇고 있는 소꿉동무가 더 크고 따뜻한 시선을 받는다.
바로 그렇기에 허영철의 이야기는 더욱 소중하고 우리 마음에 와 닿는다. 의도하지 않아도 민중의 눈높이에 닿아 있는 사람. 덧칠하거나 미화하지 않고 자신이 본 것만을 솔직하게 구술하고 기록하는 진정성을 지닌 사람. 그렇게 우리는 저자인 허영철을 따라 일제시대, 한국전쟁, 정전협정과 남북분단, 그 뒤 4․19와 5․16, 5․18 광주 항쟁, 그 빛났던 6월 항쟁과 6․15 선언을 지나 현재에 이르기까지 파란만장한 현대사를 ‘한 번도 비껴가지 않고’ 뜨겁게, 가장 소박하고 순수한 민중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다.
36년의 긴 수감 생활을 하기까지
1920년에 태어난 허영철 선생은 올해로 87세가 된다.
전 라 북도 부안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육체노동에 단련되었고, 일본 유바리 탄광과 아오지 탄광에서도 일했다. 1945년 해방이 되던 해 남로당에 입당, 초보 노동당원으로서 혁명가의 길을 걸었고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난 뒤에는 부안군 인민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9월에는 당의 소환을 받아 북으로 가 중국 송강성에 있던 중앙당학교에서 간부 교육을 받고, 황해도 장풍군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활동했다. 남에서도, 북에서도 가장 민중과 가까운 조직인 인민위원회 일을 했다. 1953년 정전협정이 이루어진 뒤, 허영철은 공작원으로 남파되었다가 1년 만에 체포된다. 그리고 국가보안법 위반과 간첩 미수죄로 무기형을 선고받고 36년의 긴 수감 생활을 거쳐 마침내 1991년 출소해 지금에 이른다.
이 보다 더 생생할 수는 없다!
육필 원고와 인터뷰, 형무소 기록들로 만나는 허영철
짧 게 적은 허영철 선생님의 연혁은 얼핏 다른 장기수 선생님들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남과 북에서 모두 인민위원장을 했다는 드문 경력과, 보통학교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밑바닥 기층 민중으로서 우리나라 현대사의 질곡을 한 번도 비껴가지 않고 함께했다는 점에서 그이의 삶은 그 자체로 빛이 난다. 그런 허영철의 삶을 더욱 두드러지게 하는 것이 바로 이 책의 구성이다.
이 책은 허영철이 자서전 형식으로 직접 쓴 육필 원고 여섯 개와, 그것을 중요한 시기마다 마무리하는 인터뷰 여섯 개로 구성되었다. 인터뷰는 독자들이 허영철의 삶에 좀더 쉽게 다가가게 해준다. 가장 순수한 영혼을 지녔던 한 노동자의 삶을 파란만장한 우리나라 역사의 흐름과 함께 풍성하게 그려낸다.
또한 제5장에서는 되풀이되는 비슷한 증언의 틀을 벗어나고자 대전 국가기록원(정부기록보존소)에 보관되어 있는 기록들로 과감히 본문을 대신했다. 곧 ‘좌익 재소자 사상동향 카드’나 면회 기록부, 서신 기록부 들이 그것이다. 형무소 기록들을 통해 새롭게 허영철의 삶에 다가가 본다. 특히 허영철의 삶을 함께 짊어가야 했던 가족들의 애틋한 마음을 서신에서 잘 엿볼 수 있다.
윤구병(한국철학사상연구회 대표) 추천사
- ‘인민의 수호 전사 허영철’ 중에서
자 본이 인간을 앞도하는 남녘 땅에서 60년이 넘게 구차하게 살아온 얼치기 지식인이자 무늬만 농사꾼인 내가 이 책에 발문을 쓸 자격이 어디 있으랴. 그래도 이 발문을 의무 삼아 쓰고 있는 까닭은 이 노혁명가의 말과 삶이 나를 부끄러움을 아는 인간으로 바꾸어 놓았기 때문이다.
동화 작가 권정생 선생이 했던 말이 기억난다. 누가 권 선생한테 “좋은 글이란 어떤 글인가?”하고 물었을 때 그분 말씀이 이랬다.
“읽고 나서 불편한 느낌이 드는 글.”
그렇다. 이 책에는 당신을 불편하게 만드는 구석이 많을 것이다. 특히 당신이 평균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나도 처음에 이 글을 읽고 몹시 불편했음을 고백한다.
"나는 여기서도 살아 봤고 거기서도 살아봤다.
다른 것은 사람이 아니라 체제이다.
다만 부정적인 면을 개선하고 더욱 좋게 만들기 위한
노력이 끊임없이 필요할 뿐이다.
나는 그 과정을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 과정을 만들고, 바꾸고, 나아가는 사람이다.
그렇게 나는, 살아 있다."
- 허영철
(본문에서)
일러두기
추천사
제1장 팥각시와 아오지 (1920-1945)
성 아래 팥각시 있어 / 지주는 지주고 소작농은 소작농이더라 / 손가락을 잃고 어른이 되었다 / 금쟁이는 꿈을 먹고 노동자는 일을 하고 / 채탄 굴에 그냥 주저앉았다 / 사람을 얻기도 하고 잃기도 하고 / 일본인 가가야와 <공산당 선언> / 고향은 변한 것이 없더라 / 아오지에서 일한다는 것 52
[마주이야기] "그때는 다 그렇게 살았어요"
제2장 노동당원과 착한 사람 (1945-1950)
나는 자랑스러운 노동당원이다! / 찬탁이 반대고 반탁이 찬성이다 / 3·22 총파업 투쟁 / 어느새 혁명가가 되어 있었다 / 시간, 그것은 영원으로 끝나기도 한다 / 변산에 허영철이 들어왔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탄생 / 내게 당은, 그런 곳이다 / 사람의 두 모습 / 착한 사람들이 잘 사는 세상
[마주이야기] "앞으로 다시는 전쟁이 없을 것이다"
제3장 빨치산과 인민위원장 (1950-1952)
전쟁의 시작, 다시 고향으로 / 부안군 인민위원장 허영철 / 서울을 지켜라! / 나는 전쟁의 한가운데에 있다 / 고향 까마귀만 봐도 반갑다 / 황해도 도치면 인민위원장 허영철 / 장풍군 인민위원회 부위원장 허영철(1) / 장풍군 인민위원회 부위원장 허영철(2) / 간부가 되면 걸음걸이부터 달라진다 / 장풍군 인민위원회 부위원장 허영철(3) / 백사지 양복천으로 빚을 갚고
[마주이야기] "그렇다면 그건, 내가 북에서 다 경험한 것이다"
제4장 영웅과 간첩 (1952-1955)
영웅은 저만큼 띄워 놓고 본다 / 이것은 당 중앙의 명령이다 / 파슬파슬 상쾌한 기분 / 남쪽에 나가면 모두 죽어 / 30초가 목숨을 살렸다 / 몇 차례 위험한 고비를 넘기고 / 허영철에서 전귀환에서 김귀환으로 / 피체
[마주이야기] "내 사상의 바탕은 사람이다"
제5장 안에 있는 사람과 밖에 있는 사람 (1955-1991)
좌익 재소자 사상 동향 카드 / 서신 기록 / 면회 기록
[마주이야기] "따뜻하고 행복한 이야기도 있어"
제6장 여기와 거기(1991-2006)
인간 승리다! / 귀향, 이제는 사라진 사람들 / 혁명가, 이리저리 사회에서 살아가기 / 보이지 않는 것이 나를 돌봐 주었다 / 역사는 나를 비껴가지 않았다 / 나는 여기서도 살았고 거기서도 살았다
[마주이야기] "우리의 소원은 통일"
덧붙이는 글
연표
별첨 표 목록
참고 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