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래알’,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의 자화상
“실낱같은 빈틈이 천 리보다 멀고, 어쩌다 바람결에 몸 닿아도 고통일 뿐.
지나던 바람이 잠깐 머물면 기대서 울 빈 가슴도, 위도, 아래도, 앞도, 뒤도, 옆도 없는
죽음처럼 답답하고 숙명처럼 어두운 모래알 둘은 사랑을 어떻게 주고받을까?” (본문 12~15쪽)
손으로 모래를 움켜쥐면 모래알은 어느새 손가락 사이로 스르르 빠져나갑니다. 쉽게 뭉쳐지지 않고, 아무리 많이 모아 놓아도 작은 파도에 손쉽게 스러져 버리는 모래알은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의 자화상입니다.
다 른 사람과 쉽게 소통하지 못하고, 사람에게 상처받을까 두려워 관계 맺기를 두려워하는 우리들. 감각에 치우친 자극에 쉽게 빠져들고, 사람들 사이에 놓인 문제를 피한 채 점점 자기 안으로만 빠져드는 우리들의 개별화되고 파편화된 모습은 모래알과 닮았습니다.
다른 사람과 소통하고, 연대하고, 사랑하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모래 두 알은 어떻게 사랑할까? 마주 볼 눈도, 냄새 맡을 코도, 이야기를 주고받을 입도, 담아들을 귀도,
꼭 끌어안을 팔도, 함께 나란히 걸을 발도 없는 모래알 둘은 사랑을 어떻게 할까?” (본문 5~11쪽)
모 래알은 눈도 없고, 코도 없고, 입도 없고, 귀도 없고, 팔도 없고, 발도 없습니다. 키 작은 모래알은 키 큰 모래알을 볼 수도 없고, 자신의 마음을 전할 수도 없고, 다가가 안을 수도 없습니다. 모래알에게는 실낱같은 빈틈이 천 리보다 멀게 느껴지고, 어쩌다 바람결에 서로 몸이 닿아도 거친 몸뚱이 때문에 고통만 느낄 뿐입니다. 다른 사람과 소통하고 관계를 맺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조건도 갖추지 못한 모래알은 어떻게 사랑을 할 수 있을까요? 살갗이 조금만 닿아도 고통을 느끼는 모래알은 혹시 사랑을 하지 못하는 건 아닐까요?
그렇다면 모래알과는 달리 눈, 코, 입, 귀, 팔, 다리가 다 있는 우리는 어떤가요? 진정으로 사랑하는 법을 알고 있을까요? 그리고 우리가 진정으로 다른 사람과 소통하고, 연대하고, 사랑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모래알 곁으로 다가온 두 친구, 실오라기와 물방울
사랑하는 법을 찾기 위해 고민하던 모래알은 어느 날 실오라기와 물방울을 만납니다. 이들은 어느 날 갑자기 모래알을 찾아와 자신들의 이야기를 풀어 놓습니다.
줏대 없는 지식인의 초상, ‘실오라기'
“어떤 때는 즐거운 척도 해 보고, 어떤 때는 심각하게 고민도 하고,
또 어떤 때는 차분하게 지내려고 애써 보기도 하고, 가끔은 잔뜩 도사려 보기도 하지만,
한 번도 오랫동안 그러고 지내 본 적이 없어. 곧장 맥이 풀리곤 했거든.” (본문 36~40쪽)
어 느 날, 모래알 앞에 나타난 실오라기 하나. 삶의 중심도 없고, 무게도 없이 이리저리 휩쓸리는 모습입니다. 마음속으로 온갖 고민을 하고, 수도 없이 계획을 세우지만, 자기 삶의 문제를 다른 사람과 함께 풀지 못하고 혼자서만 끌어안으려고 합니다. 윤구병 선생님은 실오라기를 빌려 관념 속에서만 살고 있는 지식인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한때 민중의 교사로서 약자의 편에 섰지만, 끝까지 건강성을 지키지 못하고 홀연히 사라져 버린 나약하고 줏대 없는 지식인의 모습을 실오라기에 빗대어 꾸짖고 있는 것입니다.
건강한 민중성의 상징, ‘물방울’
“우리와 달랐던 것, 우리보다 더 낫다고 믿었던 것, 우리보다 더 몸집이 크거나 무게가 있었던 것,
하나같이 모두 슬그머니 주저앉고 바다에 이른 것은 우리뿐이었어. 우리끼리 해낼 수밖에 없었던 거야.”
(본문 72~73쪽)
물 방울은 건강한 민중성을 상징합니다. 물방울은 일정한 형태가 없기 때문에 바늘구멍 같은 아주 작은 틈만 있어도 놓치지 않고 파고듭니다. 몸집이 크지도, 무게가 많이 나가지도 않기에 어느 곳이든지, 어디까지라도 갈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자기들만의 순수함을 지키기 위해 ‘나’와 ‘너’를 구별하거나 경계를 두지 않습니다. 냄새가 어떻건, 빛깔이 어떻건, 향내가 나든, 구린내가 나든, 물방울을 둘러싼 모든 것을 자기 안으로 받아들입니다. ‘나’를 고집하기보다 ‘너’를 받아들이는 ‘열린 마음’이 바로 물방울이 상징하는 건강한 민중성의 핵심입니다.
오랜 고통 끝에 찾아낸 모래알의 사랑법
“부드럽게 일렁이는 잔물결 힘을 빌려 옆에 있는 모래알들을, 그 낯설고 거친 몸뚱이들을
온몸으로 어루만졌다. 살이 닳고 뼈가 부서지는 아픔을 참고 오래오래 어루만졌다.”(본문 101~102쪽)
윤 구병 선생님은 진정한 사랑이란 살과 뼈를 깎는 고통이 따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서로 상처받고, 상처주고, 고통에 몸부림치고, 아파하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서로를 어루만지는 것. 바로 모래알이 깨우친 ‘진정한 사랑을 하는 방법’입니다. 모래알이 잔물결의 힘을 빌려 다른 모래알과 만나게 되는 설정은 모래알이 물방울로 상징되는 건강한 민중성을 얻었다는 뜻입니다.
이 책을 젊은이들한테 권하는 까닭
《모래알의 사랑》은 전두환 군사 정권이 펄펄 날뛰던 1982년에 도서출판 까치에서 낸 책입니다. 윤구병 선생님은 이 책이 당시 사회 변혁을 꿈꾸던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의식화 교재가 되길 바랐고, 실제로 만 부가 넘게 팔리기도 했습니다. 군사 독재 시절, 현실에 대한 비판이든 정부에 대한 비판이든 무엇 하나 자유롭지 않았기 때문에 모래알을 주인공으로 철학 우화를 쓰게 된 것입니다. 이 책을 보면서 다만 몇 사람이라도 건강한 민중성을 갖게 되기를, 서로 소통하고 연대하는 힘을 바탕으로 현실과 맞서길 간절히 바랐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25년이 지난 지금, 이 책을 다시 펴내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윤구병 선생님은 25년 전이나 지금이나 본질은 바뀐 게 없다고 했습니다. 아니, 오히려 과거보다 사회?경제 모순은 더 깊어졌고, 사람들도 그 어느 때보다 파편화되고 개별화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비정규직, 양극화, 교육, 환경 문제처럼 함께 해결해야 할 굵직굵직한 일들은 쌓여 있지만, 이런 문제를 앞장서서 풀어 가야 할 우리들은 서로 뜨겁게 연대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윤구병 선생님은 이 책을 젊은 세대가 많이 읽었으면 합니다. 청년 실업과 비정규직 문제로 고통 받고 있는, 그래서 현실에 맞설 힘마저 잃어버리고 있는 젊은이들이 이 책을 잃고 조금이나마 힘을 얻길 바라고 있습니다. 모래알이 찾아낸 ‘진짜배기 사랑법’은 25년 전이나, 지금이나 우리에게 소중한 깨우침을 주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