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자 김근태,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견뎌온 짐승 같은 시간
민주주의자 김근태의 평화 발자국을 만화로 돌아본다
김근태는 1985년 9월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10차례에 걸쳐 고문을 당했다. 고문으로 조작된 자백을 근거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는 유죄가 되었고 징역 5년형을 받았다. 그리고 28년 뒤, 김근태가 세상을 떠난 지 2년 반이 지난 2014년이 되어서야 김근태의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는 ‘무죄’ 판결을 받았다. 고문으로 허위 진술을 강요하고, 이렇게 얻어 낸 진술은 유죄의 증거로 볼 수 없다는 정의가 이제서야 인정을 받은 셈이다. ‘고문 빼고 다 한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는 지금, 이 땅의 민주화를 앞당기기 위해 애써 온 김근태의 시간을 만화로 돌아본다. 뚝심 있는 작가 박건웅이 550쪽이 넘는 만화로 생생하게 담아 냈다.
김근태, 남영동에서 견뎌 낸 ‘짐승 같은 시간’을 기록했다
‘남영동에 끌려 간다’는 말은 남영동에 가서 고문을 당한다는 뜻이다.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을 결성하고 우리 나라 민주화를 위해 힘쓰고 있던 김근태는 1985년 9월 4일 남영동에 끌려 갔다. 22일이 지나 남영동에서 빠져나올 때까지, 김근태는 남영동 건물 5층 맨 끝 방에서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고문을 10차례 당했다. 물고문부터 시작해서 전기 고문, 전기봉 고문 들을 견디고 고문자들이 가하는 심리적 고문까지도 당하며 짐승 같은 시간을 보냈다. 김근태는 굴복을 바라는 고문자들의 요구에 당장은 저항하지 못하더라도 마음속에 마지막 자존심의 불씨는 지키며 이 끔찍한 시간을 이겨 냈다. 1985년 12월 19일, 법원에서 김근태는 고문자들이 몸과 머리에 각인 시켜 놓은 고문 트라우마를 벗어던지고, 남영동에서 있었던 고문의 실상을 모두에게 고발했다. 《짐승의 시간》은 김근태가 남영동에서 강요받았던 ‘짐승 같은 시간’을 만화로 기록한 책이다.
평범한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지옥을 재현했다
끔찍한 고문을 가하는 이들은 길거리에서 마주칠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자식의 대학 입시나 취업을 걱정하는 사람들, 그이들은 누군가에는 자상하고 따뜻한 아버지였다. 라디오를 듣고 잡지를 읽으며 돌아오는 기념일에 식구들에게 어떤 선물을 할까 고민하는 이들은, 자신과 다를 바 없는 한 인간에게 아무런 양심의 가책 없이 끔찍한 고문을 가했다. 1호선 남영역에서 고개만 들면 볼 수 있는 회백색의 건물 안에서, 평범한 사람들이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고문을 자행했다. 그들은 그저 위에서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어떠한 목적을 이루려고 할 때 끔찍한 고문이 시작된다. 《짐승의 시간》은 평범한 사람들이 제도나 틀 안에 갇혀 행동할 때 어디까지 악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 준다. 또한 작가 박건웅은 누군가가 시키는 대로, ‘직업’으로 고문을 행하는 자들의 폭력적인 몸과, 고문을 가하며 때로는 희열을 느끼는 얼굴 표정까지 놓치지 않고 표현해 냈다.
바로 지금, 김근태 정신을 기억하고 지켜 나가야 할 때
“거대 국가 폭력 앞에 인간은 나약하다. 그렇다고 포기하면 지는 거다. (……) 부조리한 사회에 눈 감고 애써 현실을 외면해 버리는 우리의 무관심과 싸워야 한다.”
_김근태, 2009년, 전남대학교 시국강연 내용 가운데
김근태는 정부 기관이 가하는 고문, 즉 국가 폭력을 겪었고 이 문제를 세상에 알려 다시는 그러한 국가 폭력이 일어나지 않도록 초석을 마련했다. 만화에서 다루고 있는 1980년대에서 30년이 지난 지금, 민간인 사찰과 간첩 조작 사건이 벌어지는 가운데 ‘고문’이 되살아나지 않은 것은 김근태 덕이다. 그러나 이를 지켜내기 위해 김근태가 짊어진 몫은 너무나 크다. 고문 후유증으로 해마다 9월이면 몸살을 앓았다. 치아 치료를 받으러 치과에 갔다가 고문 당시 기억이 떠올라 치료를 받지 못하고 돌아올 정도로 고문 트라우마도 김근태를 괴롭혔다. 생을 마감하기 전 진단받은 파킨슨병도 고문 후유증 때문이라고 한다. ‘로버트케네디 인권상’을 받고 ‘세계의 양심수’로 선정된 김근태는 우리 나라의 민주주의를 한 단계 발전시키기 위해 자신의 몸을 오롯이 바친 셈이다. 한마디로 김근태는 우리 나라 인권 운동의 상징이자 민주주의 실천자이다. 우리가 이렇게 민주주의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고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어쩌면 김근태와 같은 이들이 자신의 목숨을 내걸고 그때 그 시간을 이겨 내서가 아닐까. 바로 지금이 ‘현실을 외면해 버리는 우리의 무관심과 싸워야 한다’는 김근태의 말을 기억하고 지켜나가야 할 때이다.
유럽에서 주목한 만화가 박건웅의 장편 그래픽 노블
《짐승의 시간》은 2013년 한국만화영상진흥원에서 기획한 해외 진출 기획원고 개발지원 사업에 선정되어 유럽 출판시장에 이미 선을 보였다. 그 결과 부아뜨 아 뷜, 데 홍 덩 로, 아그륌, 캄부라키, 엉 쁠루아이에 뒤 무아, 드로조필, 라쿠풀라 등 모두 7군데나 되는 유럽 출판사에서 박건웅의 만화 《짐승의 시간》에 관심을 보였다. 해외 진출 기획원고 개발지원 사업에 선정된 여러 원고 가운데 해외 출판사의 러브콜을 가장 뜨겁게 받은 책이다. 작품을 살펴 본 유럽 출판사들은 박건웅 작가가 만화로 표현해 낸 그림과 연출이 매우 뛰어나다고 극찬했다. 대한민국의 역사와 정치인을 다루고 있지만, ‘고문’은 세계 어디에서나 일어날 수 있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중요한 문제다. 보편적인 주제와 박건웅 작가의 작품성이 유럽에서 인정받은 것이다.
노근리학살, 제주 4·3 항쟁, 비전향 장기수 등, 주제마다 그 주제를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기법을 고민하고 작품으로 표현해내는 작가 박건웅. 이제는 ‘고문’이라는 인간 존엄의 문제까지 장편 그래픽 노블로 그려 냈다. 돼지가 어떻게 죽는지 직접 본 이들은 고기를 먹지 못한다. 그러나 이를 보지 못한 이들은 맛있게 고기를 먹을 수 있다. 작가 박건웅은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해 짐승 같은 시간을 보낸 김근태의 삶을 날것으로 우리 앞에 들이민다. 이 만화를 본 당신은 우리가 공기처럼 느끼고 있는 민주주의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질 것인가? 이것이 작가 박건웅이 이 만화를 볼 독자들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저자 소개
박건웅 | 만화
1972년 여름 서울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으며 대학에서 회화를 전공했다. 대학 시절을 거치며 한국 근현대사의 숨겨진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고 작업을 해 왔다. 빨치산 이야기를 다룬 《꽃》과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민간인 학살을 다룬 《노근리 이야기》, 제주 4·3항쟁을 그린 《홍이 이야기》, 비전향 장기수인 허영철 선생의 삶을 다룬 《나는 공산주의자다》들을 만화로 그렸다. 작품마다 주제에 맞는 여러 가지 기법을 써서 어려운 소재들과 역사의식을 풀어내고 있다. 경향신문 블로그(http://ppuu21.khan.kr)에 ‘칸과 칸 사이’를 연재하고 있으며 지금은 부천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을 눈에 보이게 하는 만화 작업에 푹 빠져 있다. 2003년 대한민국만화대상 신인상, 2010년 오늘의 우리만화상을 수상했다.
추천하는 말
독재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공동선과 공동체를 파괴하는 괴물입니다. 독재와 불의한 정권에 맞서 항거하는 것은 인간의 보편적 권리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불이익을 감수하고 때로는 목숨까지 바쳐야 합니다. ‘민주주의자 김근태’는 자신의 몸을 바쳐 우리에게 ‘김근태 정신’을 남겼습니다. 그렇습니다! ‘김근태 정신’은 우리 사회 공동체의 인간성을 회복하고 평등을 이룩하는 일입니다. 선후배 동지들과 마음을 모아 김근태를 기억하는 이 아름다운 책이 많은 사람들 손에 건네지기를 바라며 기도합니다.
- 함세웅 신부
《짐승의 시간》은 영화 <남영동 1985>를 찍으며 체험했던 감성을 고스란히 일깨운다. 콘크리트 사각의 밀실에서, 반복되는 고문과 구타, 비명과 눈물을 끝없이 거듭하다가 마침내 그들은 짐승의 시간에 이른다. 무지막지하게 폭력을 휘두르는 가해자는 물론이고, 벌거벗은 채 탈진한 피해자마저 더 이상 인간이 아니다. 꺼이꺼이, 헉헉 가쁜 숨 몰아쉬는 짐승일 뿐이다. ‘내가 누구인가?’ ‘왜 여기 있는가?’ 따위의 질문이 머무를 자리가 없다. 슬픔, 아픔, 분노마저도 사치한 감정들이다. 그저 허기진 짐승일 뿐이다.
- 정지영 영화감독
고문을 하는 자들에게도 군에 간 자식이 있고, 시험에 시달리는 딸아이가 있다. 이 평범한 사람들이 권력의 하수인이 되어 악마가 되어 버린다. 식민지 시절, 독립운동가를 잡던 일제의 주구들처럼 차마 헤아릴 수 없는 악행을 서슴없이 저지르는 것이다. 부당한 권력은 그늘진 곳에서 의인을 유린한다. 뼈가 저리고 살이 깎이는 육체를 시험하며 사람을 침몰시킨다. 비틀린 시대의 십자가를 짊어진 김근태는 벼락을 맞다 다 타 버린 고목처럼 내상을 입고 저들의 폭력 앞에서 가라앉고 있었는지 모른다. 《짐승의 시간》은 짐승들의 틈바구니에서 자유를 찾는 ‘사람의 길’을 그려 냈다. 고통을 고스란히 재현해 내는 2년 여의 시간은 심난했을 터이다. 강단진 박건웅만이 해낼 수 있는 작업이다.
- 이희재 만화가
부정 선거, 간첩 조작, 민간인 사찰이 자행되고 있다. ‘고문 빼 놓고 다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민주주의가 처절하게 파괴되고 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시대에 그래도 고문이 부활하지 않은 것은 오로지 김근태 덕이다. 이 만화를 볼 독자들의 아버지, 어머니 세대는 다 김근태에게 갚아야 할 빚이 있다. 손이 참 부드럽고 따뜻했던 김근태는 딸 결혼식 날 딸내미 손 한 번 잡아 주지 못하고 홀연히 우리 곁을 떠났다. 우리가 김근태처럼 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마음 한구석, 지친 김근태가 쉴 자리를 마련해야 하지 않을까? 김근태는 1980년 광주를 겪고,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간직한 사람들의 맏형이고 큰오빠였다. 세월호 세대들이여, 살아남은 자의 슬픔으로 부대끼는 밤, 떨리는 가슴으로 근태 형을 만나다오.
- 한홍구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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