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격변하는 역사를 관통한 김학철의 마지막 산문집
사또님 말씀이야 늘 옳습지
무선 | 152×225 mm | 480 쪽 | ISBN 9791163143765
어른
펴낸날 2024-09-09 | | 글 김학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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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마르크스주의자 김학철의 산문을 만나다
〈김학철 문학 전집〉 여섯 번째 권 《사또님 말씀이야 늘 옳습지》는 1987년에서 2001년 사이에 〈연변일보〉 〈장백산〉등에 발표한 산문 59편을 실은 산문집으로, 남한에서 처음 출판하는 책이다. 이 책은 중국 연변에서 2002년에 처음 출판되었는데, 김학철은 이 책을 준비하다가 세상을 떠나 그의 마지막 산문집이기도 하다.
김학철은 평생 400편이 넘게 산문을 썼다. ‘육칠년 동안 발표한 글이 200편을 넘었다(산문 수업)’고 할 만큼 치열하게 산문을 썼다. 김학철은 ‘산문 수업’에서 자신은 “루쉰의 문풍을 모방하는 사람”이라고 하며, “사물을 관찰할 때는 그 본래의 면모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는 루쉰의 통찰력을 중시하였다. 또한 사회 병폐를 날카롭게 해부하고자 한 루쉰의 ‘수술칼 정신’은 김학철의 글쓰기 정신이기도 하다.
김학철은 동서양을 종횡무진 넘나들면서 다양한 에피소드들을 버무려서 사회의 부조리한 모습을 파헤치는 글을 썼다. 자신이 몸바친 항일 운동을 바탕으로 하는 한편 살아가면서 겪은 사소한 일도 무심히 넘기지 않았다. 김학철은 동서고금 다양한 에피소드들에 비추어 국제공산주의 운동에서 나타난 문제, 공산당 집권 뒤의 중국 사회의 문제, 인간의 양심 등 현실의 문제를 짚어냈다.
김학철은 한반도와 중국에서 격변하는 20세기를 온몸으로 치열하게 살아왔다. 중국에 정착해서도 모택동의 개인숭배에 맞서며 사회의 모순과 불의에 굽히지 않았다. 그런 김학철의 글들을 통해 오늘날 우리는 잊혀진 역사를 올바로 복원해야 하고, 사회 변혁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깨닫게 해 준다.
❚‘칼 쓰고 춤추기’―권력에 맞서는 풍자
‘칼 쓰고 춤추기’란 말은 루쉰이 국민당 정부의 언론 통제하에 글을 써서 발표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를 자조적으로 한 말이다. 1957년 ‘우파분자’로 몰려 강제 노동을 하고, 《20세기의 신화》를 썼다는 이유로 ‘반혁명 현행범’이 되어 1967년부터 10년 동안 감옥살이를 한 김학철에게도 해당하는 말이다.
24년 만에 글을 다시 쓸 수 있게 된 김학철은 공산당 집권 뒤 권력의 폭력성과 검열 제도 등 부조리하고 부패한 현실을 비유와 반어, 풍자적인 수법으로 비판한다. 당시 현실 문제를 제대로 쓸 수 없는 어려움을 ‘층층시하’ ‘우리 손녀’ ‘사은 기도’ 같은 글에 썼는데, 보신주의가 만연하여 언론마저 사회의 비리와 부정부패를 외면하는 현실에 대한 깊은 고민을 볼 수 있다. ‘벼슬 중독자’ ‘한 총리와 두 대통령’에서는 자리에 연연해하는 봉건적 작태들을 풍자하고, ‘염치와 담 쌓으신 분들’ ‘작가와 조방구니’ 같은 글에서는 중국 조선족 문인들의 도덕적 타락을 비판한다. ‘창발력 만세’ ‘얼음장이 갈라질 때’ ‘흙내와 분내’ 등의 글에서는 작가들의 사명을 강조했다. 즉 작가들은 ‘희생을 할 각오가 돼 있어야 권력의 전횡을 막을 수 있다’고 호소한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전쟁 예산’을 유일하게 반대한 독일의 카를 리프크네히트, 1968년 일본 국회에서 ‘핵 확산 방지 조약’에 유일하게 찬성표를 던진 시가 요시오(‘1표 반대’)같이 인류 역사에서 자기 신념을 지킨 인물들의 일화를 통해 권력에 맹종하지 말고 신념을 지켜야 함을 역설했다.
‘이른바 삼천 궁녀’에서는 “봉오동, 청산리 전투에 대한 후세 사람들의 과장”을 바로잡고 조선의용대 창립에 참여한 대원들 120명의 이름을 하나하나 기록하였다. 잘못된 역사를 복원하고 사실에 바탕한 역사 기록을 중요시하는 김학철의 강한 의지를 볼 수 있다.
❚중국 변방에서 우리말을 힘써 지키다
김학철은 우리말뿐 아니라 중국어, 일본어도 잘한 작가다. 그런 작가가 중국에서 우리말법을 지키면서도 말을 갈고 닦는 노력이 산문 전반에 나타난다.
‘보스락장난’ ‘왕청되다’ ‘핀둥이를 쏘이다’ ‘갈갬질’ ‘암질러’같이 남한에서 사라져가는 우리말을 풍부하게 구사하고, ‘워리워리나 꼬독꼬독이나 매한가지 개값’, ‘부처 밑을 기울이면 삼거웃이 드러난다’, ‘던져 마름쇠’ 같은 속담들을 적절하게 써서 글을 읽는 재미가 있다. 글 사이사이에 우리말이나 한자어, 영어식 외래어, 역사에 관련된 낱말들에 대해 작가는 세심하게 낱말 뜻을 풀어 주었다. 이는 김학철의 글을 읽는 고등학생부터 대학생, 농민 등 당시 독자들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우리말이나 영어식 말들을 풀이해 독자들과 대화하는 마음으로 쓴 것이다.
고국을 떠나 오랜 세월을 다른 언어권에서 살면서 우리말을 정확하고 풍부하게 쓰려고 애써온 김학철을 느낄 수 있다.
▮김학철(金學鐵) | 글
본명은 홍성걸(洪性杰). 1916년 조선 원산에서 태어나 서울 보성고보 재학 중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중국 상해로 탈출, 김원봉 휘하 의열단 반일 테러 활동에 가담,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하고 1938년 조선의용대 창립 대원으로 항일 투쟁의 최전선에서 활약했다. 1940년 중국공산당에 가입, 1941년 태항산 호가장 전투에서 일본군과 교전 중 다리에 부상을 입고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압송, 나가사키형무소에서 4년 동안 복역했다.
옥중에서 부상당한 다리를 절단하고 1945년 일본이 투항하여 출옥했다. 서울에서 조선독립동맹에 참여, 단편 〈지네〉(1945년)를 발표하면서 창작활동을 시작하고, 그 뒤 평양에서 〈로동신문〉 기자로 일하다가 1950년부터 중국 북경 중앙문학연구소(소장 정령)에서 창작활동을 계속했다. ‘문화대혁명’ 시기 《20세기의 신화》 필화사건으로 10년 동안 옥살이를 했다. 1980년 복권되어 창작활동을 재개하고 2001년 9월 25일 연길에서 세상을 떠났다.
장편소설 《해란강아 말하라》(1954년), 《격정시대》(1986년), 《20세기의 신화》(1996년), 소설집 《무명소졸》(1989년), 《태항산록》(1989년), 산문집 《누구와 함께 지난날의 꿈을 이야기하랴》(1994년), 《나의 길》(1996년), 《우렁이 속 같은 세상》(2001년), 《사또님 말씀이야 늘 옳습지》(2002년), 전기문학 《항전별곡》(1983년), 자서전 《최후의 분대장》(1995년) 등 이 밖에도 많은 저서를 남겼다.
▮추천하는 말
김학철 선생은 정통 사회주의자이고 인류가 가야 할 길은 사회주의라는 생각을 한 번도 버린 적 없다. 끝내 권력과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꿋꿋이 걸어간 사람이다.
내가 이런 김학철 선생의 작품을 처음 읽은 것은 1948년 <담뱃국>이라는 소설이었다. 김학철 선생은 사회주의자이지만 그가 쓴 소설에서는 인간의 여러 가지 모습, 사람 사는 기쁨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 뒤 그 작품에 대해 서평을 쓴 인연으로 연변에서 김학철 선생을 여러 차례 만나게 되었다. 내가 본 김학철은 정직하고 겸손한 사람이었다. 또 소설 쓰는 것을 매우 즐겨했다.
김학철 선생의 글은 한국 문학을 매우 풍부하게 만드는 중요한 한국 문학의 한 갈래라고 본다. 그가 쓴 글들이 <김학철 문학 전집>으로 나온다니 참으로 기쁘다. 혁명적 낙관주의자 김학철 선생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
_신경림 시인
한국의 보리출판사에서 <김학철 문학 전집> 전 12권이 출판된다고 합니다. 정말 반갑습니다.
김학철은 불요불굴의 사회주의자였습니다. 그가 평생 지향한 것은, 그의 말을 빌리면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였습니다. 그것은 어려움 속에서도 마음은 넉넉했던 팔로군 생활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에게는 인간의 얼굴을 하지 않은 사회주의는 있을 수 없고, 사회주의가 되려면 인간적이어야만 하는 것이었지요.
2001년, 김학철의 유해는 태어난 고향인 원산에 닿도록 두만강에 띄워 보내졌습니다. 원산에 닿은 유해는 한국에 와서 <김학철 문학 전집>으로 태어났고, 동해를 건너 일본으로 가서 <김학철 선집>이 되었습니다. 이제 더 나아가 태평양, 대서양, 인도양을 건너 전 세계로 퍼져 나갈 것입니다.
_오무라 마스오 와세다 대학 명예교수
김학철 선생이란 어른의 성함을 처음 들은 것은 1980년대이다. 내가 국회에서 선배로 모신 송지영 선생이 “김학철이란 분이 계시는데 그분이야말로 진정한 휴머니스트이고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공산주의자이시지. 그분은 한 번도 지조를 꺾지 않으셨고 올곧은 그대로 삶을 사셨다.”고 소개했다.
최후의 독립군 분대장 김학철 선생은 일찍부터 독립운동에 가담해 태항산에서 일본군과 전투 중 총격을 당해 다리를 다치고 일본군에 붙잡혔다. 일본에 협조했다면 치료라도 제대로 받았을 테지만, 그것도 거부하여 평생 다리 하나가 없는 불구가 된 채 일본 감옥에서 해방을 맞이했다.
김학철 선생은 전 생애를 레지스탕스로 일관하셨다. 그분이 누리고 바라는 삶은 간단하다. 필수품으로 원고지와 펜, 그리고 간단한 옷가지, 누울 자리만 있으면 그것으로 족했을 것이다. 왜 우리는 마하트마 간디를 찾아야 하나? 우리의 스승은 바로 김학철 선생인데!
이제라도 김학철 선생의 작품을 모아 전집을 낸다고 하니 매우 반갑다. 김학철 선생의 해학과 유머가 있는 여유로운 필체를 독자들도 함께 느끼길 바란다.
_이종찬 우당교육문화재단 이사장
김학철이 없었다면 우리의 굴욕적인 식민지사의 한 부분은 어찌 되었을까. 그 굴욕이 한결 비참하고 수치스럽지 않았을까. 우리의 독립투쟁사 말기에 ‘조선의용대(군)’라는 다섯 글자가 박혀 있다. 그런데 그 독립군이 어떻게 결성되고, 어디서, 어떻게 싸웠는지 실체적인 명확한 기록이 없었다. 그 역사 망실의 위기를 막아낸 사람이 바로 김학철이다.
김학철은 바로 조선의용군의 ‘최후의 분대장’으로 싸우다가 왼쪽다리에 총상을 입었고, 치료를 받지 못해 상처가 썩어 들어가다가, 일본의 나가사키형무소까지 끌려가 결국 절단당하고 말았다.
그 후 그는 불편하기 짝이 없는 ‘외다리 인생’을 살아 내면서 총 대신 펜을 들고 문인의 삶을 개척했다. 그리고 소설을 창작하기 시작했다. 그의 고결한 영혼 속에서 탄생한 진솔한 작품이 바로 《격정시대》이다. 그는 그 소설을 통해 작가의 진정한 소임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었다. 작가는 민족사에 기여하고, 인류사를 보존해 가는 존재다.
이제 그분의 모든 작품들이 전집으로 묶여 우리 문학사에 크게 자리 잡으며 많은 독자들을 만나게 되었다. 기쁘고 보람스러운 일이다. 선생께서도 특유의 잔잔한 미소를 지으실 것이다
_조정래 소설가
▮본문 중에서
첫 문장
여름철이면 의례건으로 따라다니는 홍보―사람이 물에 빠져 죽었다는 소식―에 접할 적마다 나는 애석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대는 마디마다 자라고 사람은 경난(經難)을 할 적마다 자란다고 한다. 그래서 나도 자랐다. 각성을 하고 그리고 크게 비약을 하였다!
그때부터 나는 맹종과 인연을 끊었다. 깨끗이 끊었다. 일도양단을 하였다. 다시는 누가 시키는 대로 맹목적으로 따라가지 않았다. 워낭 소리를 듣고 따라가는 눈먼 망아지 노릇을 하지 않았다. _36쪽
한 정권이 존속의 위기에 처해지면 처해질수록 언론의 통제란 으레 강화되기 마련이다. 그러니까 역설적으로는 안정이 되면 될수록 언론의 문이 넓어진다는 얘기가 되겠다. _80쪽
‘문화대혁명’ 시기에 나는 반혁명죄로 공판을 받은 적이 있는데 그때 당국에서는 방청자를 천여 명씩이나 청해 오면서도 유독 피고인의 가족은 하나도 방청을 시키지 않았었다. 방청만 시키지를 않은 게 아니라 공판을 한다는 사실조차 아예 알리지를 않았다. 아마 세계 공판사상에서 유례를 찾아보기가 힘들 횡포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횡포를 폭로하고 비판할 때 내가 쓴 수법은 견책이나 규탄이 아니었다. 내가 쓴 수법은 함축성 있는 풍자였다.
“500년 전에 에스파냐의 약탈자들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원주민(인디언)들을 무수히 학살했다. 부모 형제와 처자식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호주 되는 사람을 무참히 살해하는 것쯤은 보통이었다.
이에 비하면 가족에게 알리지 않고 공판을 하는 것은 문명스러운 행위일지도 모른다. 처참한 광경을 가족들에게 보이지 않으려는 자비심의 발로였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이런 식으로 치부(남에게 보이면 부끄러운 곳)를 찌르는 방법을 로신에게서 나는 배운 것이다. _83쪽
한 사회의 진보란 자연적으로 거저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한 사회의 진보란 반드시 투쟁으로써 쟁취를 해야 하는 것이다. _191쪽
옳지 않은 것을 뻔히 알면서도 복종을 아니 할 수가 없는 백성들이 혼자 중얼거리는 말이다.
“사또님 말씀이야 늘 옳습지.” _283쪽
‘세월이 워낙 태평무사하면 태평가도 부르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게 ‘단결’을 외치는 것은 단결이 돼 있지가 않기 때문이란다. 그와 마찬가지로 굳이 ‘저명한’을 붙인다는 것은 곧 그리 저명하지가 못하다는 뜻일 것이다. 굳이 ‘무슨 급’을 붙인다는 것은 곧 그만큼 자격이 부족하다는 반증일 것이다. _315쪽
여기 한 장의 사진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62년 전, 그러니까 1938년 10월, ‘대무한 보위전(大武漢 保衛戰)’이 막판에 접어들었을 무렵, 전화(戰火) 속의 한구(漢口)에서 창건된 조선의용대(조선의용군의 전신). 그 발대식에서 찍은 기념사진. 그 사진을 공개하는 것으로 나 이 노전사는 전적비의 건립을 대신하고자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사진은 4분의 1 정도가 잘려 나간 까닭에 30여 명 대원의 모습은 영원히 되살릴 길이 없어졌다. 사진에 남아 있는 것은 80여 명뿐. 하지만 무릇 그날 발대식에 참렬(參列)했던 이들의 이름은 빠짐없이 다 적어서 밝혀 놓기로 한다. _39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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