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왜 ‘선조’를 읽는가? 정치란 우리에게 무엇인가?
이 책은 흔히 무능한 왕, 영웅을 시기한 왕, 임진왜란도 막지 못한 한심한 왕이라 불리는 조선 제14대 왕 선조를 새롭게 돌아보는 책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가장 훌륭한 정치는 다른 무엇보다 ‘백성’에게 쓸모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선조는 알다시피 많은 실수와 잘못을 저지른 왕이다. 하지만 백성을 위한 의서 <동의보감> 편찬도, 가장 위대한 민생 개혁이라 일컫는 대동법도 모두 선조가 그 기틀을 마련했다. 혹독한 전쟁을 겪고 나서 비로소 선조는 깨달았던 것이다. 정치란, 오로지 백성을 위해 있어야 한다는 것을.
한미 FTA, 4대강, 강정마을, 그리고 코앞에 닥친 총선과 대선까지 온갖 정치 상황이 어지러운 이때, ‘선조’라는 과거 왕의 역사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무엇인지, 진정 올바른 정치는 과연 무엇인지 책을 통해 함께 읽어 보기 바란다.
청소년~성인
펴낸날 2012-04-05 | 1판 | 글 함규진 |
15,000원
13,500원 (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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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왜 ‘선조’를 읽는가? 정치란 우리에게 무엇인가?
이 책은 흔히 무능한 왕, 영웅을 시기한 왕, 임진왜란도 막지 못한 한심한 왕이라 불리는 조선 제14대 왕 선조를 새롭게 돌아보는 책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가장 훌륭한 정치는 다른 무엇보다 ‘백성’에게 쓸모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선조는 알다시피 많은 실수와 잘못을 저지른 왕이다. 하지만 백성을 위한 의서 <동의보감> 편찬도, 가장 위대한 민생 개혁이라 일컫는 대동법도 모두 선조가 그 기틀을 마련했다. 혹독한 전쟁을 겪고 나서 비로소 선조는 깨달았던 것이다. 정치란, 오로지 백성을 위해 있어야 한다는 것을.
한미 FTA, 4대강, 강정마을, 그리고 코앞에 닥친 총선과 대선까지 온갖 정치 상황이 어지러운 이때, ‘선조’라는 과거 왕의 역사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무엇인지, 진정 올바른 정치는 과연 무엇인지 책을 통해 함께 읽어 보기 바란다.
“선조를 통해 지금 이곳의 역사를 읽는다”
왜 하필 선조냐고? 어떤 사람을 못났다고 욕하기는 참 쉽지만, 그 못난 사람의 내면에 들어 있는 ‘진심’을 읽어 내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일단 어렵게라도 그 진심을 읽고 나면 거기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함규진, ‘들어가는 말’에서)
조선 제14대 왕 선조는 여러모로 욕하기 참 쉬운 임금이다. 임진왜란을 대비하기는커녕 혼자 살겠다고 도망치기 바빴고, 영웅 이순신을 질투해 죽게 했으며, 동인이니 서인이니 하는 당파가 생긴 것도 모두 선조 때라고 손가락질 받는다. 하다못해 폭군 연산군이나 광해군도 요즘에는 새롭게 평가받는 편인데, 선조만은 그렇지 못하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일까? 모두가 쉽게 욕하는 이 임금에게서 우리는 한 치의 장점이나 진심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일까? 오히려 그렇게 찾아낸 장점이야말로 뼈에 새길 교훈이 되는 것은 아닐까? 사람은 가장 밑바닥에 떨어졌을 때 가장 큰 깨달음을 얻기도 하니까 말이다. 바로 그 지점에서 “선조를 새롭게 읽는” 이 책은 시작된다.
선조, 정말 그렇게 무능한 왕이었을까?
돌이켜보면 선조 시대는 이황, 이이로 시작해 기대승, 유희춘, 유성룡, 조식, 이원익, 이순신, 곽재우, 이지함, 허준 같은 온갖 인재들이 줄줄이 빛나던 시대였다. 오죽하면 후대의 실학자 이익이 “우리 나라 인재는 선조 임금 때 가장 많이 나왔다”고 감탄했을까. 오랫동안 이어져 왔던 외척 정치를 밀어 내고 청렴한 ‘선비 정치’를 시작한 시대이기도 하다. 하지만 임진왜란이라는 최악의 전쟁이 이 모든 것을 빛바래게 만들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이야말로 무능력하고 시기심 많은 임금 선조를 비로소 백성에게 도움이 되는 정치를 하는 참된 임금으로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혹독한 전쟁과 고난을 몸으로 겪고 나서야 비로소 선조는 깨달았던 것이다. 백성에게 쓸모 있는 정치가 가장 가치 있다는 것을. 그 깨달음을 실천으로 옮긴 것이 바로 백성을 위한 의서 ⟪동의보감⟫ 편찬과 대동법 같은 민생 정책이다.
오랜 고난과 고독의 기간의 끝에, 마침내 다다른 선조의 깨달음, 결심.
그것은 다른 무엇보다 백성의 실제 필요에 뿌리박은 정치를 해야 하며, 따라서 가장 쓸모 있는 것, 가장 ‘실용’에 가까운 학문과 정책에 힘을 써야 한다는 것이다. 암행어사도, 고마제도, 대동법도, 동의보감도 모두 다 그런 정신의 산물이다. (본문, ‘왕의 죽음, 그리고 그 뒤’에서)
백성을 살리기 위해 만들었다!
흔히 대동법을 두고 “조선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민생 개혁”이라 일컫는 것은, 상하기 쉬운 특산물을 세금으로 바치는 공납의 피해가 그만큼 컸기 때문이다. 그것을 쌀로 바꾼 대동법은 이중, 삼중으로 세금을 내야 했던 백성들의 크나큰 시름을 한결 줄였다. 비슷하게 민간의 말과 재산을 함부로 빼앗지 못하게 한 ‘고마제’도 굶주린 백성들의 등을 펴게 했다.
또 <동의보감> 편찬은 전쟁이 끝난 뒤 병으로 죽어 가는 백성들, 특히 주위에 약초가 있는데도 그 사용법을 ‘잘 몰라서’ 죽어 가는 백성들을 살리려는 마음에서 시작되었다.
“벽지 마을이나 인구가 적은 마을에서는 의사와 약이 없어 손도 쓰지 못하고 일찍 죽는 일이 많소. 사실 우리나라 곳곳에서 약초가 많이 나는데도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해 그러는 것이 아니겠소? 이 약초들을 분류해 두고, 각 지방에서 불리는 이름도 같이 써 백성들이 알기 쉽게 하시오.”(본문,‘실용에 주목하라’에서)
허준이 쓴 <동의보감> 서문에는 이렇듯 선조가 책을 편찬하게 명한 이유가 적혀 있다.
비록 <동의보감>도, 대동법도, 고마제도 시행하기 얼마 전에 선조가 죽어 반포한 공은 갓 즉위한 광해군에게 돌아갔지만, 이 모든 것의 기틀을 마련하고 마무리까지 갔던 이는 누가 뭐래도 선조이다. 선조가 있었기에 대동법도, <동의보감>도 가능했던 것이다. 바로 그 점이 이 책이 선조에게 주목하는 까닭이다.
선조, 그리고 ‘지금 이곳’의 역사
그렇더라도 현명한 역사를 읽어도 모자란 판에 한심하고 무능한 왕을 읽다니, 왜?
대뜸 그런 물음이 떠오를 법하다. 글쓴이는 이렇게 대답한다. 사람은 시대와 장소가 달라도 현실을 보는 눈은 늘 같기에, “과거의 잘못을 통찰하는 것만으로도 ‘지금 이곳’의 역사에서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을 수 있다”고. 그래서 새롭게 선조를 읽는 것이라고.
그렇다면 2012년 ‘지금 이곳’의 역사가 어떤지 둘러보자. 실용을 앞세워 무리하게 벌인 4대강 사업 때문에 자연과 사람이 함께 죽어 가고, 서민들을 위한다는 한미 FTA는 더욱더 크나큰 가난과 고통으로 사람들을 밀어 넣을 것이다. 아름다운 구럼비 마을을 파괴해서 전투함이 드나드는 거대한 해군 기지를 세우는 것이 과연 평화를 위한 결정일까? 지금 이곳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이 정말로 백성을 위한 정치이고, 실용일까?
아니다. 그런 정치는 가짜일 것이다. 백성을 잘 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죽이는 거짓 실용, 백성을 위해서가 아니라 잘사는 상위 1퍼센트가 더 잘살기 위해서 벌이는 ‘꼼수’에 지나지 않는다. 무능하다 손가락질 받는 선조조차 그런 정치는 거짓임을 알았다.
요즘처럼 가진 자가 더 갖기 위해서, 자기반성과 성찰은커녕 잘못을 회피하려고 갖다 붙이는 거짓 실용이 아닌, 진정 힘들고 어려운 사람을 돕기 위한 참된 실용의 가치. 그래서 모든 백성들이 고루 행복해질 때 비로소 그 가치는 더욱 빛나게 될 것이다. (본문,‘왕의 죽음, 그리고 그 뒤’에서)
백성이 고루 행복해질 때 비로소 빛나는 가치, 그것이 진짜 실용의 의미고 진짜 정치의 목적이다. 백성이 고루 행복하지 않다면, 그런 정치는 가짜이다. 자기네만 잘 먹고 잘살겠다는, 뻔한 거짓말에 지나지 않는다.
이제 더는 그런 거짓말에 속지 않기 위해서라도, 과거의 잘못을 통찰해 ‘지금 이곳’의 역사에서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꼭 이 책을 읽기 권한다. 선조조차 “모든 백성들이 고루 행복해질 때” 비로소 참된 정치가 이루어짐을 알았다. 하물며 그 뜻을 지금 이곳에서 허물 수는 없지 않은가.
그것이 두 번의 선거를 통해 무언가를 바꿀 수 있는 2012년 지금 이때, 아니, 모두가 평등한 대동 세상이 올 때까지 앞으로도 계속, 선조를 새롭게 읽어야 하는 까닭이다.
최악의 전쟁 임진왜란을 겪고 나서 백성에게 필요한 실용의 정치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은 선조가 오늘날 우리를 보았더라면 과연 뭐라고 말했을까? 선조의 마지막 깨달음을 기억하자. 백성에게 쓸모 있는 것이‘진짜’실용이다.(본문,‘나가는 말’에서)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보리 한국사”, 이렇게 만든다
민중의 눈으로 보는 역사, 깨달음을 주는 역사!
보리 한국사는 보리 출판사에서 처음 선보이는 젊은이를 위한 역사 시리즈다.
볏과의 두해살이풀 보리는 힘들고 배고픈 보릿고개를 무사히 넘기게 도와주는 백성들의 소중한 양식이었다. 또한 보리(菩提)는 불교에서 가장 깊은 깨달음과 지혜를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
보리 한국사는 바로 그 두 가지 말뜻을 이어받아 만든다. 곧 지배자가 아닌 ‘백성’의 눈으로 보는 역사, 단순히 과거에 박제된 딱딱한 역사가 아니라 세상을 바꾸는 ‘깨달음과 지혜’를 주는 역사를 이야기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보리 한국사다.
과거를 배워, 현재를 알고, 미래를 바꾼다!
그렇다면 세상을 바꾸는 깨달음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는 왜 역사를 배울까?” 하는 근본 물음과도 이어진다.
정말로 우리는 왜 역사를 배울까? 단순히 과거 사실을 알려고 배우는 것은 아닐 터이다. 그보다는 과거 역사를 거울삼아, 현재의 상황이나 잘못을 깨닫고, 그 깨달음으로 좀 더 나은 미래를 만들고 싶기 때문이리라. 딱딱하게 굳어 있는 역사가 아니라 지금 이 시대에 살아 있는 역사를 읽고, 나아가 좀 더 살기 좋은 미래를 만들 수 있는 힘과 지혜를 얻고자 우리는 역사를 배우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지금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세상을 바꾸고,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보리 한국사다.
젊은이들이 읽어야 한다!
무엇보다 보리 한국사는 앞으로 역사를 짊어질 젊은이들을 위해 책을 엮어 낸다.
젊은 학생들, 청년들, 앞으로 미래를 짊어질 다음 세대들.
왜냐하면 그들이 역사를 읽어야 비로소 세상이 바뀌기 때문이다. 지금은 아무 힘도 없어 보이지만, 88만 원 세대라고 불리며 등록금과 아르바이트에 허리가 휘고, 입시 전쟁과 취업 전쟁에 마냥 허우적대도, 그들에게는 앞으로 미래를 바꿀 힘이 있다. 힘센 자들이 아무리 억누르고 지우려 해도 다음 세대의 새로운 변화까지 마음대로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젊은이를 위한 역사,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보리 한국사다.
『역사는 누가 바로 알아야 할까? 누가 읽어야 할까?
못사는 사람이 알아야 한다. 못살게 된 젊은이들이 읽어야 한다. 나쁜 세상에서 버림받는 이들이 알아야 하고, 또 읽어야 한다. 그래야 더는 버림받지 않고, 더는 못 살지 않는다. 이 나쁜 세상에서 잘 먹고 잘사는 사람들은 역사를 바로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 사람들에게 힘센 자들이 만들어 온 삐뚤어진 역사는 거저 물려받은 선물일 뿐이다. 자기네들 편할 때 끌어다 써먹는 고마운 치부책일 뿐이다.
그러므로 역사를 배워야 한다. 역사에서 올바른 가르침을 끌어내야 한다.
보리가 역사를 되살피고 그 성과를 새롭게 엮어 내야 하는 까닭을, “나는 이렇게 본다.”
―윤구병
글쓴이 | 함규진
1969년 서울에서 태어났습니다. 성균관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고, 지금은 서울교육대학교 윤리교육과 교수로 일하면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래전부터 동양과 한국의 정치사상을 연구하고, 글을 써 왔습니다. 역사와 인물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고요. 한 가지 꿈이 있다면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보수와 진보처럼 반대편에 서 있는 것들 사이에 서로 통하는 길을 내고 함께 살아갈 넉넉한 집을 짓는 것입니다.
쓴 책으로는 《왕의 투쟁》, 《왕이 못 된 세자들》, 《왕의 밥상》, 《108가지 결정》, 《고종, 죽기로 결심하다》 들이 있고, 《팔레스타인》, 《죽음의 밥상》, 《물에 빠진 아이 구하기》, 《록펠러가의 사람들》 같은 책을 우리말로 옮겼습니다.
‘선조’라는 어려운 주제를 받고 과연 이 인기 없는 군주를 그 남자가 살아간 험한 시대와 맞춰 잘 그려 낼 수 있을지 고민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책을 마치고 나서는 어느 정도 선조가 받아 온 오해를 푸는 데, 그리고 가장 진솔한 모습을 발견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순진한’ 생각에 감히 책을 내놓는다고 전해 왔습니다.
※ 앞으로 나올 책들
《문체반정, 나는 이렇게 본다》
18세기 말 소설이 쏟아져 나왔다. 사람들은 처음 보는 생생한 소설 문체에 흠뻑 빠졌다. 그러자 임금이 잡스럽고 천한 소설은 당장 버리라고 호통을 쳤다. 이른바 ‘문체반정’의 시작이었다. 문체를 바꿔 생각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던 임금 정조와, 세상 모든 사람들이 만드는 자유로운 문체를 꿈꾸었던 선비. 과연 문체반정은 누구의 승리였을까?
《동학, 나는 이렇게 본다》
조선 역사 처음으로 밑바닥 민중들이 올곧이 함께 모였다. 곧바로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다. 남녀도 없었다. 노소도 없었고, 귀천도 없었다. 그저 종과 주인이 서로 친구라 부르며 얼싸안았던 뜨거운 대동 세상뿐. 한때, 참으로 짧은 순간. 그러나 참으로 오래도록 이어질 찬란한 꿈. 그 눈부신 이야기를 우리는 이렇게 부른다. ‘동학’이라고.
《김삿갓, 나는 이렇게 본다》
나라는 망해 가고 권력은 부패하니, 백성들은 등이 휘고 피눈물 난다. 굶어 죽은 주검 앞에 시 한 수 바칠까. 이름도 몰라 성도 몰라, 그대 고향 어드메뇨. 썩은 살에 파리 붙어 잉잉대는데, 저녁 까마귀 외로운 넋 찾아 날아가누나! 굶주리고 억눌린 백성들이 가장 사랑한 시인, 백성들과 함께 세상이 뒤집히는 꿈을 꾸었던 시인을 만난다.
미리보기 준비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