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체를 통해 시대를 읽는다!
문체반정은 당시 유행하던 소설 문체를 나쁜 문체로 몰아 엄격히 금하는 정책이다. 조선의 마지막 개혁 군주라 불리는 정조가 이런 시대를 거스르는 정책을 펼쳤다.
정조는 문체를 바르게 바꿔 세상도 바르게 바꿀 수 있다는 생각에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을까?
임금이 앞장서면 자유로운 문체마저 다스릴 수 있다고 정말 믿었을까?
임금에 맞서 세상 사람들 모두가 만드는 자유로운 문체를 꿈꾸었던 이들은 또 어찌 되었을까? 정조와, 이에 맞서 끝까지 자기 문체를 지켰던 박지원, 이옥의 이야기를 통해
“시대와 문체, 그리고 변혁”의 의미를 생각해 본다.
성인
펴낸날 2012-10-25 | 1판 | 글 김용심 |
1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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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체반정, 대체 왜 하라는 거야?”
아무리 당신이 왕이더라도, 아무리 당신이 문체반정을 일으켰더라도, 초라한 백성으로 살면서 그들을 기록하는 저를, 눕거나 서거나 웅크리거나 하면서 자유롭게 쓰고 싶은 글을 쓰는 저를, 당신이 어찌 하시겠습니까? 아무리 거대한 흐름이더라도 물은 물. 결국에는 돌을 스쳐 흘러갈 뿐이지요. (본문, ‘너나 하세요, 문체반정’에서)
문체반정, 문체를 통해 시대를 읽는다!
정조 시대 문체반정을 새롭게 돌아보는 책. <문체반정, 나는 이렇게 본다>는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보리 한국사’ 시리즈 둘째 권으로, 자칫 어려울 수도 있는 문체반정이라는 주제를 쉽고 재미있게 풀면서 “시대와 문체, 진정한 변혁”의 의미까지 아울러 짚은 책이다.
문체반정은 당시 유행하던 소설 문체를 엄격하게 금하고 수천 년 전 고전 문체로 돌아가자는 정책이다. 개혁 군주라 불리는 정조가 왜 시대를 거스르는 이런 정책을 펼쳤을까? 그 까닭과 과정을 살펴보면서 학문과 정치,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차디찬 얼음 갑옷을 입고 무너져 갔던 정조의 열정과 한계를 만나 본다. 또한 임금에 맞서 끝까지 자기 문체를 지키며 또 다른 세상을 꿈꿨던 박지원, 이옥의 이야기를 통해 시대를 뛰어넘는 문체와 변혁의 의미도 담았다.
문체반정의 속내를 처음으로 들여다본다!
이제껏 문체반정을 독립된 주제로 다룬 책은 없었다. 그저 정조 시대를 서술한 책이나 18세기 문화 상황을 짚는 책에서 부분부분 나왔을 뿐이다. ‘문체’라는 것이 워낙이 쉽지 않은 주제이거니와, 개혁 군주라는 정조의 평소 이미지와도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체반정을 연구한 논문들에서조차 정조에 대한 판단은 늘 엇갈렸다.
“바른 정치는 바른 문장에서 나온다”는, 전형적인 학자 군주 정조. 그러나 그 뒤에는 문체를 앞세워 탕평책을 꾀하거나, 노론 대신들을 견제하거나, 아끼는 남인 학자들을 구하려 하는 노회한 정치가 정조의 모습도 함께 숨어 있다.
이 책에서는 문체반정의 모든 것을 다룬다. 문체반정이 왜 일어났으며, 어떻게 전개되었고, 또 마무리는 어찌 되었는가. 문체반정의 의미는 무엇이며, 정조의 의도는 무엇이고,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했는가. 결국 문체반정은 성공했는가, 실패했는가?
정조, 정조 시대, 그리고 문체반정.
떼려야 뗄 수 없는 세 가지 이야기들이 책 속에서 시원하게 파헤쳐진다.
문체반정의 뒤끝, 진짜 이야기는 지금부터다!
문체반정을 정조의 시각에서만 살펴보면 아마도 반쪽짜리 분석 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모든 신하들이 다 임금의 명에 고개를 숙일 때, 임금 반대편에 서서 당당하게 저항하고 맞선 사람들이 분명 있었다. 임금에게 꼿꼿이 맞선 두 사람, 바로 당대의 학자 박지원과 유생 이옥이다.
절대 권력자 임금에 맞서 당당히 자기 목소리를 내고 끝까지 문체를 지켰던 그이들을 만났을 때 비로소 “문체를 통해 시대를, 또는 사람을 읽는” 이 책의 큰 그림은 완성된다. 그리고 이 책에서 가장 흥미진진한 대목도 바로 거기서 시작된다. 문체반정의 과정보다 문체반정의 ‘뒤끝’ 이야기가 오히려 이 책의 진짜 본론이다.
박지원과 이옥, 문체로 임금과 맞장 뜨는 사람들
연암 박지원은, 정조가 문체가 나빠진 ‘원흉’으로 박지원을 지목하면서 문체반정의 핵심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당장 바르고 곧은 고전 문체로 반성문을 써내라!” 호통 치는 임금에게 무릎 꿇지 않았다. 오히려 끝까지 자기주장과 목소리를 높인다.
이옥은 과거에서 장원급제를 하고도 문장에 소설체가 섞였다 하여 최하 꼴찌로 내처졌다. 그 뒤로 끝내 벼슬자리에 오르지 못하고 평생을 무명의 선비로 살았다. 그래서 흔히 이옥을 문체반정의 최대 피해자라 일컫는다.
이 책에서는 이옥을 새롭게 해석한다. 이옥은 피해자도 아니었고, 결코 불우하지도, 실패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임금과 시대를 뛰어넘는 당당함을 글에서 보여 준다. 그것도 도니, 예니, 의니 하는 거창한 이야기가 아니라 작은 꽃, 벼룩, 욕설, 담배, 개나 돼지 같은 사소하고 흔한 이야기로 “천지만물의 감성, 가장 작은 것의 외침”을 들려줌으로써 개성 있는 문체를 완성했다.
“이제 사람들은 더는 경서의 시대, 고전의 시대에 살고 있지 않았다. 그보다는 새로 등장한 소품이나 자유로운 산문이 훨씬 더
사람들을 흔들었다. 때로는 욕도 하고 상소리도 섞고 음담패설도 튀어나오지만, 토끼 이야기를 하다가 벼룩 이야기를 하다가 용왕 이야기로 튀기도 하지만, 그래서 더 생생하고 자연스러운 글. 살아 있는 현실의 글. 바로 그런 글이 당시에는 필요했던 것이다.” (본문에서)
이옥의 글을 통해 비로소 우리는 진짜 문체를 만날 수 있다. 수천 년 전 고전을 본뜬 낡은 문체가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 이곳을 사는 사람들을 생생하게 그려 내는 문체. 현실을 똑바로 바라보게 하는 문체. 그런 문체가 ‘진짜’인 것이다.
임금은 세상에서 가장 나쁜 문체라며 내친 패관소품이 이옥에게는 “가장 작고 천대받는 이야기여서 가장 멋지고 위대해지는” 글이었다. 그 선언 속에 담긴 ‘진실’은, 이옥과 정조가 살아간 시대뿐 아니라 지금 현재도 여전히 유효한 이야기를 우리에게 던져 준다.
문체를 바꾸면 세상도 바뀐다!
문체는 시대와 함께 움직인다.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과 함께 변화한다. 정조의 문체반정이 결국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아무리 임금이더라도 혼자 힘으로 문체를 바꿀 수는 없다. 문체를 변하게 하는 주체는, 글을 쓰고 말을 하는 사람들 ‘모두’이기 때문이다.
지금 새롭게 문체반정을 읽어야 하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임금 정조는 결코 혼자 할 수 없었지만, ‘모든 사람들’이 하면 정조가 생각한 것처럼 문체를 바꿔 세상을 바꾸는 일이 가능하니까. 모두가 함께 세상을 바꾸는 것이 진정한 변혁이다.
이 책을 통해 다시 한번 ‘시대와, 문체와, 변혁’의 의미를 되새겨 보자.
한 가지 더! 본문만큼이나 알찬 부록!
하나, 문체반정 시기에 ‘문체’를 두고 일어난 문신 이동직과 정조의 날카로운 논리 대결.
둘, “이런 호래자식 같으니!”, “젖비린내 나는 것들!” 하고 소설보다 더 육두문자를 내뱉는 어찰 속의 정조와 그런 자신에게 북북 붉은 줄을 긋는 정조. 두 정조의 비교 체험.
셋,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문체반정 기록들.
특히 어찰 속의 ‘쌍스러운’ 정조와, 실록 속의 ‘점잖은’ 정조를 함께 보는 즐거움을 누리시라.
글쓴이 김용심은
글을 읽고 쓰는 것을 좋아하는 충청도 ‘촌사람’입니다. 엉뚱하며, 으하하하 크게 잘 웃고, 털털하다 못해 늘 어딘가 잘 부딪히고 넘어지는데, 참으로 뜻밖에도 나무나 풀, 꽃 같은 것을 가꾸기 좋아합니다.
기자로 글쓰기를 시작해, 자유기고가 노릇을 오래 했고, 몇몇 책을 쓰거나 편집했으며, 틈틈이 소설과 다큐멘터리와 시나리오도 썼습니다. 또한 국어사전 작업까지 했으니, 거의 온갖 종류의 글을 다 만져 본 셈입니다. 그 덕분에 ‘문체’반정의 글쓴이로 뽑혀 부족한 공부를 해 가며 쓰느라 두루 고생이 많았다고 합니다.
쓴 책으로는 중국 북송 시대를 배경으로 한 역사 소설 《임금의 나라 백성의 나라》가 있고, 《세계사신문》, 《나무도감》, 《선생님, 우리 연극해요》를 쓰거나 함께 썼으며, 비전향 장기수의 치열한 삶과 곡절 많은 현대사를 함께 볼 수 있는 《역사는 한 번도 나를 비껴가지 않았다》, 《보리 국어사전》 들의 편집을 맡았습니다.
글을 쓰면서 가장 애썼던 점은, ‘정확하지만 따뜻하게’ 보자는 것이었는데, 과연 그만큼 몫을 해냈는지는 읽는 이들 판단에 맡긴다고 전해 왔습니다.
■ 앞으로 나올 보리 한국사 책들
<동학, 나는 이렇게 본다>
조선 역사 처음으로 밑바닥 민중들이 올곧이 함께 모였다. 곧바로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다. 남녀도 없었다. 노소도 없었고, 귀천도 없었다. 그저 종과 주인이 서로 친구라 부르며 얼싸안았던 뜨거운 대동 세상뿐. 한때, 참으로 짧은 순간. 그러나 참으로 오래도록 이어질 찬란한 꿈. 그 눈부신 이야기를 우리는 이렇게 부른다. ‘동학’이라고.
<김삿갓, 나는 이렇게 본다>
나라는 망해 가고 권력은 부패하니, 백성들은 등이 휘고 피눈물 난다. 굶어 죽은 주검 앞에 시 한 수 바칠까. 이름도 몰라 성도 몰라, 그대 고향 어드메뇨. 썩은 살에 파리 붙어 잉잉대는데, 저녁 까마귀 외로운 넋 찾아 날아가누나! 굶주리고 억눌린 백성들이 가장 사랑한 시인, 백성들과 함께 세상이 뒤집히는 꿈을 꾸었던 시인을 만나 보자.
<선조, 나는 이렇게 본다>(출간)
흔히 무능한 왕, 영웅을 시기한 왕, 임진왜란도 막지 못한 한심한 왕으로 불리는 조선 제14대 왕 선조를 새롭게 돌아본다. 선조는 결코 완벽한 임금도, 완벽한 인간도 아니었다. 그러나 누가 뭐래도 성실한 사람이었다. 최악의 전쟁 임진왜란을 겪고 난 뒤, 선조가 얻은 마지막 깨달음을 기억하자. 백성에게 쓸모 있는 것이 ‘진짜’ 실용이다.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보리 한국사> 이렇게 만든다.
민중의 눈으로 보는 역사, 깨달음을 주는 역사!
보리 한국사는 보리 출판사에서 처음 선보이는 젊은이를 위한 역사 시리즈다.
볏과의 두해살이풀 보리는 힘들고 배고픈 보릿고개를 무사히 넘기게 도와주는 소중한 양식이었다. 또한 보리(菩提)는 불교에서 가장 깊은 깨달음과 지혜를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
보리 한국사는 바로 그 두 가지 말뜻을 새겨 만든다. 지배자가 아닌 ‘백성’의 눈으로 보는 역사, 단순히 과거에 머물고 마는 역사가 아니라 세상을 바꾸는 ‘깨달음’을 주는 역사를 이야기하려 한다.
그래서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보리 한국사다.
과거를 배워, 현재를 알고, 미래를 바꾼다!
세상을 바꾸는 깨달음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는 왜 역사를 배울까?” 하는 근본 물음과도 이어진다.
지난 역사를 거울삼아, 현재의 잘못을 깨닫고, 그 깨달음으로 미래를 더 바르게 만들기 위해 역사를 배워야 한다. 딱딱하게 굳어 있는 역사가 아니라 지금 이 시대에 살아 있는 역사를 읽고, 나아가 좀 더 살기 좋은 미래를 만들 수 있는 힘과 지혜를 얻고자 우리는 역사를 배우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을 바꾸고,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보리 한국사다.
젊은이들이 읽어야 한다!
보리 한국사는 앞으로 역사를 짊어질 젊은이들을 위해 책을 엮어 낸다.
젊은이들이 역사를 읽어야 세상을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아무 힘도 없어 보이지만, 88만 원 세대라고 불리며 등록금과 아르바이트에 허리가 휘고, 입시 전쟁과 취업 전쟁에 마냥 허우적대도, 젊은이들은 앞으로 미래를 바꿀 힘이 있다. 힘센 자들이 아무리 억누르고 지우려 해도 다음 세대의 새로운 변화까지 마음대로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젊은이를 위한 역사,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보리 한국사다.
역사는 누가 바로 알아야 할까? 누가 읽어야 할까?
못사는 사람이 알아야 한다. 못살게 된 젊은이들이 읽어야 한다. 나쁜 세상에서 버림받는 이들이 알아야 하고, 또 읽어야 한다. 그래야 더는 버림받지 않고, 더는 못 살지 않는다. 이 나쁜 세상에서 잘 먹고 잘사는 사람들은 역사를 바로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 사람들에게 힘센 자들이 만들어 온 삐뚤어진 역사는 거저 물려받은 선물일 뿐이다. 자기네들 편할 때 끌어다 써먹는 고마운 치부책일 뿐이다.
그러므로 역사를 배워야 한다. 역사에서 올바른 가르침을 끌어내야 한다.
보리가 역사를 되살피고 그 성과를 새롭게 엮어 내야 하는 까닭을, “나는 이렇게 본다.”
(윤구병, ‘보리 한국사를 펴내며’에서)
미리보기 준비 중입니다.